빚이 불러온 죽음들
일가 친척 등 온 가족이 모두 모이는 설날, 거제의 한 가족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검찰의 부검 결과 35세 가장이 배우자와 아이들을 숨지게 한뒤 스스로 자살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배우자는 물론 꽃같은 자식들 마저 함께 죽일 수 밖에 없었던 비극의 배경은 평소 ‘빚문제로 고민해 왔다’라는 한 줄로 서술된다.
1월에는 전남 여수에서 일가족이 탄 승용차가 바다에 빠졌고 지난 해 12월에는 40대 가장이 사업실패로 큰 빚을 안고 3살 된 딸과 자살을 했다.
10월에는 부동산 경매로 빚만 안게된 가족이 엄마와 딸이 먼저 죽고 남편이 뒤따라 자살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당시 13살된 딸은 ‘나랑 엄마랑 먼저 갔다고 너무 슬퍼하지 마. 그리고 따뜻하게 입고 잘 차려 먹고. 나랑 엄마랑 의식이 있어도 깨우지 말고 행복하게 가게 해줘’라는 슬픈 유서를 남겼다.
거의 한달에 한번 꼴로 가족 동반 자살과 관련된 끔찍한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빚의 위력은 우리 사회에서 ‘반드시 갚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 마땅’한 사회적 명령으로 확인된다.
가계부채가 1000조원이 넘어서고 빚으로 인한 자살사건이 연이어 발생해도 개인 빚을 탕감해주거나 깎아주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될 일처럼 금기시한다. 모두가 한 목소리로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을 ‘죄인’으로 단죄한다.
그러나 채무자를 상담하는 현장에서 이 빚진 죄인들을 구제하지 않으면 결국 죽음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자주 경험한다.
빈집에 들어와 붙여놓은 빨간딱지
‘아무도 없는 집에 문을 따고 들어와 압류 딱지를 붙여 놨어요. 빚을 갚을 능력은 없고 아이들 공부하는 컴퓨터랑 살림살이 다 가져가면 저 정말 먼저 죽을 생각이었습니다.’
혼자 아이 둘을 키우는 어느 여성의 눈물섞인 하소연이다.
드라마에선 종종 사업실패로 주인공의 부잣집에 차압 딱지가 붙는 장면이 등장한다. 38세의 그녀는 드라마에서 보았던 하루아침에 몰락한 부잣집 사모님이 아니다. 낮에는 일용직을 밤에는 식당일을 병행하며 남편이 남기고 떠난 빚을 갚느라 두 아이와 함께 고되게 살아가는 가난한 엄마이다.
그녀는 4년전 남편과 별거를 시작했다. 생계형 맞벌이 부부였으나 어느날 남편이 실직을 했다. 남편은 그 사실을 부인에게 숨긴 채 카드 빚만 크게 만들었다. 몇 개월간 남편이 카드 돌려막기로 키운 빚은 부인이 보증을 서서 대부업 대출로 갚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렇게 갚아도 카드 빚은 다시 생겼다.
부부 싸움이 잦아졌고 결국 별거로 이어졌으며 빚은 연체 상태가 되었다. 연체 상태이지만 부인은 홀로 일용직과 식당일을 병행하면서 되는데로 조금씩 갚아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저기 쌓여 있는 빚은 갚는 속도보다 연체이자가 불어나는 속도가 더 빨랐다. 카드 빚은 가까스로 줄여나가고 있었지만 대부업체에서 빌린 돈은 연체 이자가 붙어 원금의 3배 쯤인 2000여만원으로 불어났다.
어느날 집에 돌아와 보니 집안 가재도구들에 빨간 딱지가 붙어있었다. 대부업체에서 유체동산 압류를 해버린 것이다.
드라마에서 보았던 고가의 가구에 붙은 딱지가 아니다. 가난한 집의 낡은 밥통, 철지난 브라운관 TV등에 붙어 있는 빨간딱지의 소름끼치는 리얼리티이다.
민사집행법 상 채권자들은 채무자가 채무 이행을 하지 못하면 채무자가 지닌 자산 모두에 대해 압류를 행사할 수 있다. 민사집행법 195조는 의복, 침구, 가구, 부엌가구 등의 일부에만 압류금지를 지정하고 나머지 집안의 온갖 살림살이에 대해 압류를 허용하고 있다.
즉 가난한 집에 있는 낡은 밥솥이나 냉장고, 철지난 브라운관 TV, 아이들이 사용하는 컴퓨터에 딱지가 붙는 것을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채무자가 없을 때 이뤄지는 압류
심지어 압류는 채무자가 없는 시간에도 가능하다. 아무도 없는 집에 열쇠공을 불러 문을 따고 들어가 딱지를 붙이는 것이 법적으로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한푼이라도 벌어보겠다고 고군분투한 하루를 보내고 고된 몸을 집안에 들여놓자 마자 궁상맞은 살림살이에 붙은 딱지를 확인한다.
오랫동안 채무자 상담을 진행해온 단체들에 따르면 그들의 절망에는 ‘어찌할 수 없는 슬픔, 두려움, 공포, 당혹스러움 등으로 얼룩져 있고 한 마디로 “죽고 싶은 심정”이라는 구체적인 표현이 아련히 흐른다’고 한다.
채권자들이 그 가재도구들을 팔아서 채권 회수를 할 생각일까? 팔아봐야 채권 회수에 거의 도움이 안 될 정도로 값이 안 가는 물건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압류를 한다.
돈을 회수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망신과 협박이 목적이다. 더 험한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도둑질을 해서라도 갚으라는 무언의 압력이다.
대한민국의 법은 이렇게 무시무시한 채무 독촉을 허용하고 있다. 갚아도 갚아도 높은 이자로 불어나는 빚을 감당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채권자들에게 탈탈 털리는 것을 허용하고 있는 셈이다.
법은 그 가여운 사람들이 딱지가 붙은 전기 밥솥으로 밥을 지어 먹을까 뚜껑과 본체 사이에 딱지를 붙이는 것도 보호한다. 딱지가 훼손되면 안되기 때문에 뚜껑을 열수가 없다. 냉장고에도 냉장실과 냉동실 사이에 딱지가 붙는다. 냉장고 문을 열수가 없다.
앞선 사례의 여성도 집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아이들 얼굴을 보는 것이 부끄러웠다고 한다. 그래도 초등학교 5학년인 그녀의 둘째 딸은 엄마를 안쓰러워하는 기특한 딸이었다. 그 어린 아이가 인터넷을 검색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시민단체(불법 사금융 피해 구제 상담을 진행하는 민생연대)를 찾아낸 것이다.
법은 ‘가난’에 어떻게 집행되는가
이들이 이 끔찍한 날벼락을 피할 수 있도록 시민단체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을까? 모든 것이 법 집행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진 일이기 때문에 빚을 갚는 것 외에 할 일이 없어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안에 아주 치사하게 존재하는 최소한의 방어를 활용해 극단의 곤란은 피했다.
빚은 남편의 빚이고 법적으로 살림살이는 부부 공동 소유이다. 남편 때문에 압류를 했으나 살림살이가 지닌 절반의 가치는 부인 몫이다.
경매가 시작되고 집안 살림은 110만원에 낙찰되었다. 낙찰받은 입찰자에게 배우자가 절반의 값으로 다시 매입할 수 있다. 그녀는 50여만원을 주고 자기 살림살이를 되샀다.
이 모든 황당한 일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법이 어떻게 집행되는 지를 보여준다. 게다가 법안의 숨어있는 최소한의 방어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른다.
대부분의 채무자들은 시민단체에 도움을 받는 것 조차 생각하지 못한다. 그저 절망에 빠진채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상태에 내몰리는 것이다.
68세 퇴직 공무원의 비극
채무자들의 빚은 소득의 불안 혹은 최소 생계비에도 못미치는 가난과 연결되어 있다. 딱지 때문에 전기 밥솥이 아닌 냄비로 밥을 지어야 하는 여성은 저소득이 빚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질병이나 사업 실패, 빚보증, 사기 등의 예측하기 어려운 돌발 변수들로 인해 빚이 시작되거나 심화되기도 한다. 평생 공무원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던 중산층 조차 돌연 연체자 신분으로 내몰린다. 68세의 퇴직 공무원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퇴직한 후 시작한 사업에서 인생을 지옥으로 추락시킬 불운을 만났다. 그는 10여년전 퇴직금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사업은 실패했으며 동업인에게 다른 빚 보증도 해주었다. 한번에 몰아닥친 불운 종합세트는 빚을 갚으려 하면 할수록 빚이 불어났다. 대한민국의 금융사슬은 은행에서 벗어나면 마치 흑마술같은 묘기를 부린다.
불쌍하거나 불운한 사람들의 빚은 카드사, 저축은행 등의 제 2금융권으로 옮겨가고 급기야 35%에 가까운 대부업체의 고금리 대출들이 무분별하게 공급되면서 악성화 된다. 은행빚을 갚으려고 카드빚을 일으키고 카드빚을 저축은행 빚으로 그것을 다시 대부업체 빚으로 돌려막기한다.
한번 실패하면 절대로 다시 일어설수 없는 대한민국의 비정한 현실이 과다 채무자로 전락하게 만들고 ‘빚진 죄인’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가혹한 빚독촉도 감수해야 한다고 강요한다.
살림살이 압류 뿐이 아니라 아이가 등교하는 시간에 맞춰 찾아오는 추심원을 대면하기도 하고 불법 추심을 채무자가 입증해야 한다는 이유로 욕설을 퍼붓는 모욕도 법의 처벌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렇게 야만적인 추심에 장기간에 걸쳐 노출된 사람들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가능할까. 문제는 2012년 금융위의 추산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장기 연체 상태인 채무취약계층이 350만명에 달한다는 점이다.
기본권보다 재산권을, 인권보다 채권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사법체계 앞에서 350만명의 장기 연체자들은 아무것도 나를 보호하지 못한다는 극단의 절망과 고독감을 안은 채 사회에서 퇴출될 수 밖에 없다.
‘빚’에 불타고 있는 화차
영화 화차에서 사채 빚에 시달리던 주인공의 대사처럼 ‘그땐 나한테 아무도 없었어.’
‘화차’는 지옥에서 죄인을 싣는, 불이 타고 있는 수레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빚을 연체하고 있다는 이유로 온갖 모욕을 당해도 아무런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연체자가 350 만명이 넘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이 화차가 불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원작은 90년대 일본의 거품 경제가 무너지면서 수많은 시민들을 카드 빚과 사채의 비극으로 밀어넣었던 사회문제를 미스터리로 풀어낸 소설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옛 시조의 한 구절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허덕허덕 빚을 갚으며 연체만은 피하고자 아슬아슬 외줄을 타고 있는 채무자들에게 저자가 던지는 연민의 외침이나 다름없다.
‘화차여, 오늘은 내 집 앞을 스쳐 지나, 또 어느 가여운 곳으로 가려 하느냐’
우리 사회 곳곳에서 불타고 있는 화차는 오늘도 어느 가여운 집앞을 기웃거리며 눈에 넣어도 안아플 자식들과 함께 삶을 마감하도록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 내 아이가 살 미래를 절망하게 할 만큼 빚독촉은 삶 자체를 지옥으로 만들어 버린다.
더욱 무서운 것은 지옥 수레에 올라탈 운명이 350만명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국회 국정감사에 따르면 3군데 금융회사에서 돈을 빌려 돌려막기로 가까스로 연체를 지연시키고 있는 사람들이 328만명이다.
거의 70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연체중이거나 연체위기에 직면해 있다. 우리나라 경제활동 인구가 2500만명 가량임을 전제할 때 3.5명중 1명 꼴로 연체 중이거나 연체 위기에 있다.
10년간 자살률 1위로도 모자라 가족 동반자살이라는 끔찍한 비극을 낳고 있는 ‘빚’
더 이상 빚으로 인한 자살을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들은 죄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과연 빚은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갚아야 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