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들의 빚을 탕감해 주는 주빌리 은행이 지난 8월 개설됐다. ‘주빌리’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대로 50년마다 노예들, 빚진 자들을 해방시켜주는 역사적인 전통이다. 통상적으로 예금을 받는 은행이 아니라 장기 연체자의 채권을 확보해 빚 문제를 정리해주고 새 삶을 찾게 해주는, 일명 사람을 살리는 은행이다.
유종일 KDI 교수는 주빌리 은행 공동은행장을 맡아 빚에 허덕이는 서민들을 돕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여성소비자신문>은 24일 서울 서대문에 있는 지식협동조합 좋은 나라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주빌리 은행을 개설한 목적은 무엇인가. 운영에 어려움은 없나.
“우리 서민경제가 가계 부채 때문에 짖눌려 있고 너무나 많은 분들이 빚을 갚지 못해 고생하고 있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빌리 은행을 개설하게 됐다. 지금까지 대략 3600명 정도 혜택을 받았는데 원금을 기준으로 해 약 180억원이 넘는 액수다. 원래 악성 채무는 이자에 이자가 붙기 때문에 이자까지 다 한다면 더 많은 액수를 지원했다고 볼 수 있다.
주빌리 은행은 간판만 ‘은행’이란 이름을 달았을 뿐 일반 은행이 하는 여수신 업무는 전혀 하지 않는다. 부실 채권 시장에서 악성 채권만 골라 매입해 이를 없애는 게 주요 업무다.
은행은 통상 3개월 이상 채권이 연체되면 이를 대부업체에 헐값에 넘긴다. 보통 부실 채권 여러 개를 묶어 원금의 10% 안팎을 받고 파는데 소멸시효(5년)가 끝난 채권도 뭉텅이로 넘기는 경우가 있다.
이 단계부터는 그야말로 영화에서나 보던 지독한 채권 추심이 시작된다. 대부업체들은 소멸시효가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는 장기 채무자들에게 집요하게 전화해 단돈 몇 만원이라도 갚으면 채무조정을 해주겠다는 식으로 꼬드긴다. 여기에 응하는 순간 채무변제 의사가 확인되고 이렇게 되면 소멸시효가 사라진 채권도 다시 살아나는 법률적 허점을 악용한다.
주빌리 은행은 대부업체로부터 채권을 기부받아 이를 소각하거나 후원금으로 부실채권을 직접 매입한다. 출범 직후 원금 37억원 가량 되는 채권을 업체로부터 넘겨받아 이를 털어내는 일을 하고 있다. 후원금으로는 원금 70억원어치 채권을 5000여만원을 주고 매입하기도 했다. 우리가 예상하거나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반응이 폭발적이어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인력이 부족한 형편이다.”
-주빌리 은행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 원리와 모순되지는 않나.
“돈을 빌렸으면 당연히 갚아야지 어렵다고 아무나 도와주면 어떻게 하느냐, 누구는 돈이 남아 돌아서 빚을 꼬박꼬박 갚고 있느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점에 대해 잘 설명드리고 오해가 없도록 해야 된다. 물론 능력이 있는 데도 돈을 안 갚는다는 것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원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살다 보면 뜻하지 않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갑자기 직장을 잃는다거나 병 때문에 많은 비용을 치러야 하는 등 뜻하지 않게 빚을 갚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소비자들은 원래 대출을 할 때 내가 이걸 과연 잘 갚을 수 있을지를 곰곰이 잘 따져보고 대출을 받아야 한다. 돈을 빌려주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고 함부로 소비자들에게 돈을 빌려주면 돈을 떼이고 손해를 보게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요즘 금융환경은 너무나 마구잡이로 돈을 빌려준다. 그리고 소비자들은 이 같은 대출 유혹 때문에 빚을 지고는 결국 어려움에 처해 대출을 갚지 못하고 오랫 동안 어려움에 시달리게 된다. 이런 어려움을 당해 도저히 정상적으로는 대출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만 도와주고 있다.
그것은 시장 경제의 개념과 전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시장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빚을 못갚고 빚에 짖눌려 경제활동에 참여 못하게 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결국 국가경제 측면에서 마이너스가 된다. 시장이 잘 돌아가기 위해서라도 빚의 굴레에 있는 사람들을 하루 속히 빚에서 벗어나게 해서 다시 희망을 가지고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주빌리 은행 이용자를 선정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 빚에 쪼들려 왔다고 해서 모두 빚을 탕감해 주면 빚을 갚고 있는 이들과 형평성이 어긋나는 건 아닌가. 그리고 이 은행을 이용하는게 개인회생이나 ‘파산’을 신청하는 것과 어떤 다른 점이 있나?
“앞에서 말한 그런 이유 때문에 한 번 빚을 못 갚는다고 해서 인생이 막을 내리면 안된다.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새 삶의 기회를 주는 것은 도덕적 의무다.
기존에도 개인회생제도도 있고 파산면책 제도가 있어 이 같은 제도를 통해 채무자들이 기존의 채무관계를 정리하고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장기 연체자들이 이런 제도가 있는지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제도의 혜택을 보기 위한 요건이 지나치게 까다롭다.
이 제도를 이용하려고 하면 비용이 들어간다. 단 돈 몇 푼이 없어서 쩔쩔 매는 분들인데 파산을 신청하려고 하면 또 다시 변호사비용 200만원 정도를 마련해야 하는 식이기 때문에 언감생심 활용하기 어려운 제도가 됐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제도를 조금 더 이용하기 쉽게 만들어야 하는 과제도 우리에게 있다. 그 어떤 좋은 제도도 그것을 악용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저희들은 기본적으로 10년 이상 장기 연체 채무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물론 돈이 있는 데도 십 년 동안 빚쟁이에게 시달리면서도 빚을 안갚는다든지 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분들이 시달리는 고통을 생각한다면 아마 그런 경우는 없을 거라고 본다.”
-장기 채무자들이 발생하는 원인은 뭔가. 소비자들이 주의해야 할 점은 뭐라고 보나.
“소비자들의 건전한 소비생활은 정말 중요하다. 자기 삶을 풍요롭게 하고 윤택하게 하는 소비를 해야 하는데 허영심에 과소비를 한다든지 앞날을 생각지 않고 카드를 마구 긁어대는 소비를 하는 것은 정말 문제다.
또 소비자들이 유혹에 이끌릴 수 있다. 때문에 금융소비자들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 소비를 부추기는 허위광고나 소비자를 현혹하는 것에 대해 대처하기 위해 금융소비자에 대한 교육도 필요하고 금융소비자 보호를 위해 필요한 규제도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실상은 금융소비자에 대한 보호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무조건 이걸 하면 돈이 된다’는 식의 광고를 해서 소비의 위험성에 대해 잘 가르쳐주지 않는다거나 ‘묻지마 대출’처럼 전화 한 통화면 다 된다는 식의 마구잡이 대출을 한다든지, 길거리에서 신용카드를 마구 뿌리는 행태 등이 문제다.
그런데 지금도 금융권에서는 금융소비자들의 등골을 빼먹어서라도 당장에 이익을 내겠다는 논리가 작용하고 있다. 금융당국도 금융기관과 너무 밀착돼 있어 단기적인 경제활성화만을 위해 부채를 부추기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나라는 전세값이 문제가 있다고 하면 당장 전세대출을 늘려주고 청년들에게 학자금을 대출해준다고 하고, 농민들이 FTA 때문에 어렵다고 하면 융자를 해주겠다고 하는 식으로 모든 문제를 빚을 내서 해결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국민을 빚으로 몰고 가는 식의 경제시스템은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 소득이 뒷받침되지 않고 빚이 누적되면 경제는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다.“
-대부업체가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특히 일본계 대부업체들의 성장세가 가파른데, 이런 현상은 바람직하다고 보나.
“대부업계의 1,2,3위를 일본계 대부업체가 싹쓸이 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한때 대부업체들의 마구잡이식 대출과 이로 인한 비인간적인 추심 등이 사회적인 문제로 번진 적이 있다. 이로 인해 일본 시민사회에서의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일본정부가 대부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했다. 이들 대부업체들이 더 이상 일본에서 버티기 힘드니까 자신들이 축적한 노하우를 가지고 한국 시장으로 몰려와 시장을 선점하고 있다.
우리가 일본과 독도문제를 가지고 신경전을 벌이는 것 보다 일본자본의 말도 안되는 횡포로부터 국내 소비자를 보호하는 게 더 중요하다. 따라서 일본자본에 대한 규제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
하물며 쇠고기도 이력제를 해 어느 도축장에서 생산된 고기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데 부실 채권은 마구 떠돌아다녀서 내 빚이 누구 손에 들어갔는지 알 수도 없다. 어느 날 이 사람이 찾아와서 빚을 갚으라고 하고 또 다른 사람이 찾아와 빚을 갚으라고 하는 식이다. 파산신청을 하려고 해도 내 빚을 누가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문제를 해결하고 선진적인 규제 시스템을 도입해서 마구잡이식 대출을 방지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대부업에 대한 규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규제의 실효성이 없다.
이자율에 대한 규제가 있긴 하지만 요즘처럼 이자율이 1~2%에 불과한 시대에 대부업체들이 35%에 해당하는 이자율을 적용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대부업에 대한 인허가 제도가 없어서 누구나 10만원만 내고 등록만 하면 되도록 한 시스템은 문제다. 이들 영세 대부업체들이 돈이 없으니까 장기 부실채권을 헐값에 마구 사들인다. 그리고는 실질적으로는 ‘쮜어짜기’ 추심을 통해 채권자들의 고혈을 짜 이익을 만들어낸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서는 추심에 관련된 규제, 즉 대부업체의 영업활동에 대한 규제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추심에 대한 규제도 있긴 하지만 규제가 추상적이다. 예를 들어 과도한 추심은 하지 말라고 돼 있는데 과연 어디까지가 과도한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잔인하고 악랄한 추심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 대부업체의 관리감독을 지방자체단체에서 하고 있지만 막상 가 보면 대부분 인력이 없다.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업무 중 한 가지 업무로 대부업체 관리감독을 하고 있어서 형식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어 규제의 사각지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해외는 어떤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월가를 비난하는 시민운동이 일어났다. 요즘은 어떤가.
“2010년 월가 점령시위가 나면서 월가의 금융위기를 촉발한 경제시스템의 문제,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정치시스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시민운동이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롤링 주빌리라는 운동이 등장했고 우리나라도 작년부터 롤링 주빌리 운동을 시작했다. 미국 역시 금융기관의 힘이 굉장히 강력하다.
금융기관에 돈이 몰리고 있고 정치권이 금융권으로부터 돈도 많이 받고 사람도 그쪽으로 많이 이동하면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 많은 규제를 단행하긴 했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그때 문제를 일으킨 금융기관들이나 사람들에 대해 과연 그 만큼의 대가를 치르게 했는가에 대한 의문도 남아 있다. 이들 금융권은 정부의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오히려 더 거대해지고 더 많은 이익을 내고 있다.
그렇게 큰 위기를 겪고도 미국 역시 제대로 된 개혁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도 최근 기성 정치인들 믿을 사람 없다, 새 인물로 싹 바꿔야 한다는 식의 정치 풍토가 형성되고 있다. 미국 대선이 진행되고 있는데 미국 정치의 지도에도 전혀 존재하지도 않았던 인물들이 기존 정치인을 위협할 정도의 파장을 일으키는 일들이 이례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기존 정치 시스템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에도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나.
“지식인이란 지식을 생산, 가공, 유통하는 사람들이다.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논문을 발표해 지식을 세상에 알리기도 하고 강연을 하거나 책을 쓰기도 한다. 농민들이 농업협동조합을 만들듯이 지식인들도 함께 모여 지식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일을 함께 하자는 의미에서 지식협동조합을 만들게 됐다.
우리나라 정치가 너무나 권력투쟁에만 집중돼 있고 그 권력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진짜 나라를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정치와 정책이 점점 자본에 끌려가고 있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끊임없이 고민을 하고 좋은 정책을 만들어야 하는데 정치가 어느듯 자본의 편에 서 있고 국민을 위한 정책을 만드는 게 너무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따라서 지식인들이라도 스스로 능률적인 정책을 생산하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지식협동조합을 만들게 됐다. 사실은 대학이 이런 일을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대학이 너무나 상업화돼 있고 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부족한 것 상황이다 보니 개개인의 지식인들이 미약하지만 모여서 협동조합을 하면 이런 대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지식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지식협동조합 좋은 나라는 설립한 지 2년이 조금 넘었는데 220명의 조합원이 있으며 이 가운데 168명의 교수가 조합원이다.”
-경제민주화와 재벌 개혁에 대해서도 연구를 많이 한 것으로 안다. 현 정부의 경제민주화가 미루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보나.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민주화 하겠다, 재벌개혁 하겠다고 대선공약을 내세웠지만 이후 별로 하고 있지 않다. 박 대통령이 경제민주화 재벌개혁을 고의로 하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뭘까. 우리 사회에서 재벌의 힘은 막강하다. 사회 각 분야의 최고 엘리트층에 가면 대부분이 재벌들과 얽혀 있다. 언론도 물론이고 관료, 정치인 등도 마찬가지다. 그렇다 보니 정말 신념에 찬 리더가 신념을 가지고 정책을 추진하지 않으면 실행하기가 무척 어렵게 돼 있는 구조다.
기업들이 경제활성화를 해야 하고 그래야 고용이 창출된다고 주장하니까 경제민주화와 같은 이슈는 금방 밀려나고 말았다. 그런데 재벌들이 경제 활성화를 그렇게 떠들어댔지만 우리 경제가 잘 되고 있냐고 하면 그렇지 않다. 적자 위기에 놓은 기업들이 엄청 많고 조선, 건설, 전자, 철강, 심지어 가전 스마트 부분의 실적까지 좋지 않다. 그런데도 기득권자들의 목소리만 커지고 그걸 자꾸 따라가다 보니까 경제가 오히려 위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정부가 청년창업을 지원한다고 해서 청년 희망펀드를 하고 있고, 중소기업을 지원한다고 하고, 벤처를 지원한다고 하고 있지만 잘 되고 있지 않다. 경제를 재벌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벤처나 청년창업, 중소기업 등은 커가기가 힘들다. 그래서 사실은 재벌개혁을 먼저 해야 창업도 활성화되고 다른 부분의 산업도 살아난다. 그것을 하지 않고 다른 것만 지원한다고 하면 오히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에 불과하고 돈만 낭비하는 꼴이 된다. 그래서 경제가 안정을 이루려면 개혁을 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필요하고 정치시스템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