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금융복지 상담센터에서 상담을 진행하는 어느 상담원의 말이다. 그는 평생을 은행원으로 살다가 지점장까지 역임한 뒤 퇴직을 했다.
그에게 세상은 온실이었다. 적당한 양의 햇빛과 물과 거름만 주어진다면 모든 화초는 예외없이 잘 자란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세상은 그에게 노력한 만큼 보상이 주어지는 온실 같은 곳이었다.
“그는 최근 초등학생 아이들이 파산 면책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아이들의 어머니는 결혼전에는 장애인 공단의 도움으로 임금이 낮기는 하지만 사무직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 둘을 출산 한 이후 몸이 더욱 약해져 걷거나 서있는 것도 제대로 할 수가 없어 일을 할 형편이 아니다.
남편은 여러 군데의 카드사에 빚을 남겨 놓았다. 물론 그 이전부터 아이들의 어머니는 카드사들로부터 빚독촉을 자주 받아 왔다. 그러나 그 때는 남편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어렵게 어렵게 해결해 가며 살았다.
남편이 사망한 후 동사무소를 찾아 기초생활 수급자 지정을 받아 생활비는 해결할 수 있게 되었지만 빚은 해결이 안된채 7년간 독촉이 이어졌다. 부채 원금은 1100여만 원이었는데 연체 이자까지 붙어서 4500만 원에 대한 빚이 아내와 초등학생 아이 둘 모두에게 상속되었다.
학력이 높고 몸이 불편하지 않았다면 여기저기 해결책을 모색하면서 상속 포기라는 절차를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 여성이 그런 법적 절차를 알 리도 없었고 알아볼 방법도 전무했다. 그저 법이란 것은 높고 무서운 담벼락 같은 것이어서 한번 갇히면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인 줄만 알았다.
상담사는 오른 쪽 손을 사용하지 못하는 어머니와 초등학교 1학년 5학년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이들을 위해 대신 진술서를 작성하고 법원의 파산 면책 신청서를 만들었다.
진술서를 작성하기 위해 찬찬히 들을 수 밖에 없던 이 세 가족의 이야기는 눈물을 삼키기도 어려울 정도로 먹먹한 것이었다.
“내 이름으로 오는 편지를 보면 반가웠어요”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생각에 무서웠습니다. 그래도 엄마는 우리와 같이 살고 있습니다. 어느날 저는 엄마에게 통장에 저축을 하고 싶다고 하였는데, 핸드폰도 중고폰 말고 새것으로 갖고 싶다고 하였는데 ‘엄마와 아빠가 잘못한 것이 있어서 저축을 못하고 핸드폰도 새것으로는 개통을 못해..미안해!’라고 하셨어요.
아빠엄마의 잘못이라는 것이 빚 때문에 그런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아빠의 빚이 저희에게 상속이 되어 동생과 저의 이름으로 편지가 온 것을 봤어요. 엄마는 우리가 말을 잘 안들으면 힘들어 해요. 엄마가 건강해서 오랫동안 저희랑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엄마께서 우리를 키우는데 힘들어하지 않게 판사님께서 도와주세요.”
아마 빚은 어떤 식으로든 갚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는 여전히 주연군이 한자 학습지를 하고 태권도장에 다니는 것 조차 불편하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돈을 빌려 갚지 못하는 가족이 할 것 다 하고 사네’라고 비정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세금으로 생활비를 의존해 사는 이 가족이 태권도장을 다니고 학습지를 하며 중고폰일 지언정 핸드폰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도덕적 해이’의 실태라고 꼬집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혹은 아이들을 굳이 법원까지 데리고 가서 파산 면책을 시켜야 하는가라고 이 아이들의 어머니를 탓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들은 살려고 발버둥 치는 중이다. 열심히 노력하면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살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이다.
애초에 채권자들이 이 가여운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준 것은 상환 능력 범위를 뛰어넘는 과잉 대출이었다. 물론 낮은 소득으로 장애인 아내와 아이 둘에게 부족한 생활비를 해결하도록 도운 것이 카드사였기 때문에 고마워 해야 한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들에게 카드빚과 대출은 필요 없었다”
신용이 낮은 사람들에게는 최대 30%에 육박하는 고금리를 챙기는 2금융권 대출은 저소득층에게 약탈적인 대출일 뿐이다. 신용도를 꼼꼼히 평가해 책임대출을 해야 할 채권자로서의 의무는 져버린 채 오늘도 문자로 고객님 고객님을 외치며 돈 빌려쓰라고 아우성이다.
상환능력 이상을 빌려주면 되돌려 받지 못한다는 징벌이 전혀 없는 대한민국에서 금융사들은 편안하게 무책임한 대출 영업을 반복하고 있다.
실제로 서울시의 금융복지 상담센터는 지난 2013년 6월부터 2014년 8월까지 15개월간 321명의 파산 면책을 도왔다. 면책된 부채의 총 규모는 580억 원에 달한다. 물론 지금은 이 보다 더 빠른 속도로 채무 취약계층을 지원하고 있고 성남시에도 금융복지 상담센터가 개설되었다.
서울시에 면책 상담을 신청한 사람들의 83%가 무직이거나 기초생활 수급자였다. 그들의 평균 소득은 46만 원이었고 평균 부채 액수는 연체 이자까지 불어나 1억 원이 넘는 상태였다.
이들이 센터에 신청 한 후 파산 면책을 받을 때까지 3개월 가량이 소요되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파산 면책을 하는 기간이 1년 가까이 소요된다는 점과 비교해 매우 신속한 절차였다.
2011년부터 좋은 하인 만들기(make good money)캠페인을 진행 중인 캐나다의 밴시티라는 신용협동조합은 ‘돈은 사람에게 투자해야’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이자 수입을 벌기 위해 금융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사람을 살리기 위해 금융업을 한다.
빚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대한민국, 이제 우리도 금융회사에는 면죄부를 주고 사람만 탓하는 것이 아닌, 사람은 살리고 금융회사에는 책임을 묻는 금융시민의식을 가져야 할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