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인 기자 hyein@kyunghyang.com
입력 : 2017.05.21 21:21:05 수정 : 2017.05.21 21:31:03
ㆍ문 정부 “소액·장기연체 채권 소각”
아이 셋을 둔 평범한 집안의 가정주부 김모씨(57). 남편이 하던 자동차 부품 도매상 사업은 1999년 망했다. 외환위기 후 거래처가 줄도산을 하면서 김씨의 남편은 자금을 회수하지 못했고 김씨는 쓰지도 않은 돈을 갚아야 하는 인생에 접어들었다. 남편이 사업 자금을 빌릴 때 김씨와 동생 부부가 연대보증을 섰던 것이 빚의 시작점이었다. 동생 부부의 집이 경매로 넘어가고 부부가 모두 파산했다.
김씨는 남편과 이혼했지만 빚과는 ‘이혼’하지 못했다.
남편이 김씨의 명의로 받은 대출과 보증으로 책임이 넘어온 빚 일부를 갚아야만 했다. 세 아이를 혼자 기르면서 손에 잡히는 대로 일을 해 13년 동안 남은 빚을 갚았다. 다 갚은 줄 알았는데 빚은 또 튀어나왔다. 얼마 전 김씨는 ㄱ은행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1990년대 말에 대출받았던 550만원을 갚으라는 것이었다. 남편이 대출을 받을 때 보증을 서며 생긴 채무 중 일부가 돌고 돌면서 아직도 살아 있었던 것이다. 채권자(은행)가 돈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소멸시효 5년은 한참 전에 지났지만, 김씨도 모르는 사이 소멸시효가 연장돼 빚은 이자까지 붙어서 김씨를 따라오고 있었다.
최근에 빚을 갚을 능력이 안되는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국가가 나서 채무 탕감을 해주는 문제가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전 공약한 대로 국민행복기금이 보유한 1조9000억원의 소액·장기연체 채권을 소각해 채무를 탕감해주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행복기금이 보유한 1000만원 이하, 10년 이상의 연체 채권을 소각하면 총 43만7000명이 채무를 탕감받게 된다.
빚을 도저히 갚을 능력이 안되는 가계가 악성 채무에 시달리지 않으면서 회생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에서 실시된 것이지만, 한쪽에서는 ‘도덕적 해이’를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빚은 당연히 갚아야죠. 그런데 소멸시효가 지난 빚이 그걸 갚을 능력도 안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끊임없이 부활해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는 게 문제라는 겁니다.”
악성 채무 문제 해결에 앞장서는 시민단체 ‘주빌리은행’의 백미옥 사무국장은 김씨의 사례를 들면서 악성 채무는 보통사람이 생각하는 정상적인 ‘빚’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악성 채무의 핵심에는 ‘죽은 채권’이 있다. 금융회사의 대출채권은 채권자가 권리를 행사하지 않은 때부터 5년이 경과하면 소멸시효가 완성된다. 2015년 금융당국이 소멸시효 완성 채권에 대해 관리감독을 강화하기 전에는 금융사들은 통상적으로 소멸시효 완성 채권을 자산유동화회사나 대부업체, 추심전문업체에 매각을 했다. 소멸시효가 지난 ‘죽은 채권’들은 액면가의 1~5%가량의 소액에 팔렸다. 채권을 산 사람들은 법원에 지급명령을 신청하거나 채무자들에게 100원이라도 변제할 의사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소멸시효를 계속 부활시켰다.
채권에 소멸시효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저소득층 중 일부는 이렇게 부활한 ‘죽은 채권’들에 시달리고 있다. 유순덕 주빌리은행 상담팀장은 “주빌리은행에 상담오는 사람들 중 다수가 외환위기 때 연대보증으로 인해 생긴 빚을 20년씩 안고 있는 경우”라며 “이자가 십수년 동안 붙어 빚이 원금의 열 배가 넘는 경우도 상당하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에서도 죽은 채권 부활은 문제로 인식하고 지속적으로 관리감독을 강화해오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지난달부터 은행 등 전 금융회사에서 소멸시효가 완성된 채권(5000만원 이하 개인채무 대상)을 다른 금융회사에 매각하지 못하도록 한 ‘대출채권 매각 가이드라인’을 시행했다.